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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 불감증에 걸린 한국교회.

삼락 2018. 7. 7. 21:21

거룩 불감증에 걸린 한국교회. // 황우 목사 백낙은.

(* 종교적인 글이오니 관심이 있으시면 읽어보세요.)

 

나는 열세 살 때부터 예수를 믿었다. 내가 어릴 때는 교회의 거룩”()이라는 성벽(城壁)이 비교적 온존했었다. 성전(聖殿)을 비롯한 성일(聖日) 그리고 성직자(聖職者) 라고 불렀으며, 모두 거룩이라고 이름 하기에 부족하지는 않았다.

(: 성직자(聖職者)라는 말은 만인제사 설에 의하면 적당한 용어가 아닐 수 있지만,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불렀다.)

주일날이 되면 성일(聖日)(이 역시 주일만 거룩한 날이 아니라, 365일 모두가 거룩한 날이긴 하다.)이라고 여겨 모두 새 옷을 갈아입고 2~30분 넘게 걸어서 예배당엘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옛날엔 예배시간에 장로님이 대표기도를 하기 위해 강단에 올라갈 때는, 강단 밑에서 무릎을 꿇고 먼저 기도를 드린 다음, 다시 강단에 올라가 의자 앞에서 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후에야 의자에 앉곤 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예배시간은 더없이 엄숙했다. 그래서 예배당에서 손뼉을 치는 것조차 불경으로 여겼다. 지금은 다르지만 그땐 여성이 설교단에 올라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었다.(여성을 비하하는 의도가 없음을 밝혀둔다.) 그리고 거룩한 성전에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것을 큰 불경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면서 이런 거룩이라는 성()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완전히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오래전 일이지만 내가 성지순례차 예루살렘을 갔을 때, 이슬람 회당인 황금 돔 안에 들어가 보려 했지만, 신발을 벗으라고 하기에 그냥 나오고 말았다. 하나님의 성전엔 신발을 신고 들어가면서, 이방 신전엔 신발을 벗고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외국에 가면 이방 신전이나 왕궁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하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문제는 요즘 교인들이 교회당에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것은 물론, 강단에까지 신발을 신고 올라가는 것에 대해서 무감각해 졌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에 내가 김천의 모 교회에 가서 두어 달 동안 설교를 했다. 그 교회도 마찬가지로 누구나 신발을 신고 강단에 오르는 것이었다. 나도 인도자의 안내를 따라 얼떨결에 그냥 신발을 신은 채 강단에 올랐었다.

지금 생각하면 편리하다는 이유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거룩을 무너뜨린 공범자가 되고 말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물론 이런 일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고, 한두 교회만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또 이런 말을 하면 구시대 유물 취급을 받을 것도 안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양심에 화인(火印)을 맞아 경건심(敬虔心)이 무디어 졌다는 생각을 하니 하나님 앞에 송구스러움을 금할 수가 없다. 나 자신이 거룩 불감증에 걸려 하나님의 존엄을 짓밟았다는 생각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 결과를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퇴 장로라는 사람이 둔기로 성전의 문을 부숴버리지를 않나, 신자라는 사람이 담임 목사에게 쌍욕을 하지를 않나, 심지어 멱살잡이를 하는 일까지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교회와 그 교권이 땅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얼마 전에 노회 홈페이지에 어떤 장로님이 목자(shepherd) = 감독(bishop) = 장로(elder)”라는 글까지 올린 것을 보았다. 지금 교회가 얼마나 큰 위기에 처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앞으로 교회가 어디로 갈 것인가가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나를 비롯한 목회자들의 잘못이 적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목회자들의 무사(無事) 안일한 태도와 거룩 불감증이 하나님의 거룩이라는 성()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권위(權威)라는 하나님의 집 기왓장을 자근자근 짓밟는 결과를 가져 왔다는 생각이다.

 

지금 한국교회는 모든 면에서 더는 내려갈 곳이 없는 바닥을 쳤다는 생각이다. 빛이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손가락질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가 모두 각성하고 회개하여야 할 때라 여긴다. 작은 것이라도 깨닫는 대로 회개하고 개혁해 나가는 제2의 종교개혁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