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보라.
멀리 보라. // 황우 목사 백낙은
얼마 전이다. 눈이 침침해서 한의원을 찾았더니 이것저것 질문이 많았다. 책을 많이 읽으십니까? 컴퓨터도 많이 하십니까? 등등이다. 그렇다고 했더니 원장께서 “본래 노안이 되는 것은 가까이 것은 보지 말고 멀리 보라는 하늘의 원리랍니다.”라고 했다.
그러고는 눈가 여러 곳에 침을 놔 주면서 “여기에 지압하시면 좋습니다.” 하고 친절하게도 가르쳐 주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나이가 들면 멀리 보라.”는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고 있었다. 그렇지! 이 말에 진리가 담겼다.
지금은 좋은 안경과 수술 요법이 발달하여 그렇지 않지만, 옛날 어른들을 보면 잘 안 보인다면서 책을 자꾸 멀리 가져가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었다.
그렇다. 나이가 들어서 너무 가까이에 있는 것을 잘 보아도 얄미울 때가 있다. 우리 어머니는 눈이 침침해서 바늘귀도 못 꾀는 데, 시어머니이신 할머니가 눈이 밝아서 바늘귀도 척척 꿰고, 밥에 티나 뉘가 있으면 며느리 타박을 하시곤 했다. 눈이 너무 잘 보여서 고부간에 언짢은 경우가 더러 있었다.
노인이 되면 가까운 소리는 가끔 못 듣기도 하고, 가까이에 있는 것은 잘 안 보인다면 잔소리도 덜하게 되고, 그래서 가정이 편하다면 백번 나은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것이 하늘의 뜻인 것을……. 그런데 요즘은 보청기라는 것이 나와서 모두가 잘 듣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때도 있는 것 같다.
상거래(商去來)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속임수를 쓴다든지, 터무니없는 이윤을 남기려 하는 행위는 장래가 밝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지금 당장에는 큰 이익이 없다고 해도 좀 멀리 내다보고, 정성과 물질을 꾸준하게 투자를 한다면 분명히 장래가 밝을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한 일이다.
더 나아가서 국가와 정부도 마찬가지다. 예를 든다면 4대강 대운하 사업을 보(洑)라고 속이고 2009년부터 2013년까지 5년간 총사업비 22조2269억 원을 쏟아부었다. 이 22조 원은 기원후 1년부터 2,000여 년 동안 매일 3천만 원씩 쓸 수 있는 돈이다.
멀리 내다보지 못한 근시안적 정책으로 국고의 낭비를 불러 왔을 뿐만 아니라,
녹조로 식수마저 위협당하는 재앙을 불러오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다. 교육정책도 그렇다. 전 정부에서 많은 예산을 투자하여 국정교과서를 시도하다가 무산되고 보니 국비만 허공에 날린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나도 목사지만 목회자도 마찬가지다. 눈앞에 구체적인 성과를 위해 너무 성급하게 추진했던 일이 결국 10년도 못가서 낭패가 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유럽의 교회들은 수십 년을 이어 교회당을 건축하는 데 반해, 우리는 수년 내에 그 결과를 보려 하여 졸속 건축으로 소중한 성도들의 헌금과 인력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아서 하는 말이다. 지도자는 적어도 한세대는 내다볼 줄 아는 선견자(先見者)요 선지자(先知者)여야 한다는 말이다.
구약의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도 그렇지만 미가 선지자는 적어도 400년 앞을 내다보고 예수께서 유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을 너무도 정확하게 예언하지 않았던가? (alrk 5:2) 그 선견적인 안목은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음을 본다.
이같이 우리는 너무 근시안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어 가까운 곳만 보려 하는 데 문제가 있어 보인다. “멀리 보라”는 이 말은 가까이에 있는 티끌을 보지 말고 멀리 태산을 보라는 말일 것이다. 가까이에 있는 나무만 보지 말고 저 멀리 펼쳐진 숲을 보라는 말일 게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개인적으로도 더 먼 곳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의욕도 사라지고, 낙담과 좌절, 그리고 절망이 찾아와 결국 심신의 퇴락을 불러오는 것을 많이 본다. 그러므로 그 존재 여부는 차치물론(且置勿論) 하고서라도 저 멀리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저 건너편을 바라볼 때 희망과 삶의 의욕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제부터라도 멀리 보자.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큰 활력소가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