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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신경 강해(11)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삼락 2021. 3. 25. 17:44

사도신경 강해(11)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사도행전237-42

오늘은 사도신경 강해 11번째로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라는 고백이다. 그런데 요즘 성도들이 교회에 나가는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우리 교회가 너무 복을 강조했기 때문에, 복 받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지만, 무엇보다 교회와 성도에게는 중요한 사명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1. 예배의 사명(레이트루기아. Leitourgia)이다.

제일 귀한 사명은 예배의 사명이다. 예배란 봉사한다.”는 의미가 있는데,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가장 귀한 봉사이기 때문이다.

2. 선교의 사명(케류그마. Kerygma)이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 우리 주님의 지엄하신 명령 때문이다. 이 선교의 영역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등,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이 모두 다 우리 선교의 영역이기 때문에 그 범위를 제한하거나 규정할 수 없다.

3. 친교의 사명(코이노니아. Koinonia)이다.

이 코이노니아가 바로 이 성도의 교제를 의미하는데, 성도들 간의 친교는 물론, 모든 이웃과의 친교를 다 포함하는 개념이다.

4. 교육적 사명(다다케. Didake)이다.

너희는 모든 사람을 제자로 삼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함이다. 오늘의 교회가 선교는 있는데 교육이 부실하여서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 기독교 역사에서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하는 이유도, 수많은 사람이 교회로 몰려들었지만, 교육의 부재로 혼란이 왔기 때문에 암흑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5. 연합적 사명(에큐메니칼. Ecumenical)이다.

우리는 모두 거룩한 공회에 속한 한 몸이요, 그 지체이기 때문에, 서로 반목하거나 중상모략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우리에게는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연합해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사도행전 237-42절의 오순절 사건에서 친교의 사명의 중요성을 좀 더 깊게 살펴보기로 하자.

오순절 날의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카이사 퀴리오스를 외치던 군중들이, 예수 퀴리오스를 외치며, 새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3천 명, 5천 명, 그리고 그 후에는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운 많은 무리가 모여들어, 놀랄 만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룬 것이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첫째 :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는 교육적 사명이다.

둘째 : 교제하였다. 성도의 사귐을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 :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했다.

넷째 :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고 했다.

다섯째 :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므로 칭송을 받았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코이노니아이며,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보내셔서 이루신 사귐이요, 교제라 하겠다.

 

그러면 누구와 사귀어야 하는가?

(1) 하나님과 사귐이다. 그것은 예배를 통해서 가능하다.

(2) 예수님과 사귐이다. 주님을 믿고 충성하므로 이루어질 수 있다.

(3) 성령님과 사귐이다. 이는 성령의 소욕(所欲)에 따르고 순종하는 데서 비롯한다.

(4) 성도 서로 간의 사귐이다. 이 사귐은 초대교회와 같이 몸과 마음과 물질을 유무상통(有無相通)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5) 이웃과 사귐이다. 이 사귐은 사랑의 실천 운동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사귐이 없는 믿음과 사랑은 모두 거짓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사귐을 신랑과 신부의 비유로, 성전의 모퉁이 돌로, 우리 몸의 지체에다가 비유하시기도 하셨고, 포도나무와 가지로도 비유하셨다. 이는 식물이 끊임없이 동화작용을 통해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이같이 성도의 교제는 불가분리(不可分離)의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사귐을 지금까지 세 가지로 계승하고 있는데, 그 첫째가 성례전이요, 둘째가 예배요, 셋째가 성령을 통한 사랑의 교통이다.

특히 교역자의 축도에서 성령의 교통하심이라는 말이 있는데, 교통이라는 말은 친교한다”. “결혼한다”. “동업한다.” “수송한다는 등등의 뜻이 있다.

 

우리가 성령의 교통하심에 동참하면 주님과 내가 결혼하는 것이 되고, 주님이 나의 모든 일에 동업해 주실 뿐만 아니라, 성령님께서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복을 수송해 주신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롬 8:35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하셨다. 이같이 우리의 친교는 이 땅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내생(來生)에까지 연결되는 것으로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귀한 관계가 된다는 말씀이다.

12:1절에도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 땅에서 교회를 통하여 부분적인 천국 사랑의 친교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며, 우리의 경주를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지켜 보고 있다고 하셨다.

 

이 친교는 누가 나를 위해 희생해 줄 것인가?” “누가 나를 위해 사랑과 동정과 연민을 베풀에 줄 것인가?”를 묻기 전에, “내가 누구를 위해 희생할 것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누가 나의 이웃이 되어주며, 누가 나의 발을 씻어 줄 것이냐를 물을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며, 내가 누구의 발을 씻어 줄 것이냐를 묻는 데서 출발한다.

 

모두가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모두가 종이 되고, 모두가 섬기려고 하면 모두가 왕이 된다는 이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 성도들 서로 간에 참다운 친교가 이루어져서, 이 땅에 주의 나라를 이루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도 동참하는 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