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키츤스.
사랑의 키츤스. // 황우 목사 백낙은.
요즘 우리나라 국회의사당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면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 코로나19가 전국적으로 심각하게 유행하는 펜데믹(pandemic)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이런 긴박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국회의원들은 무제한 토론의 형식인 필리버스터(filibuster)를 한답시고 밤낮으로 “아무 말 대 잔치”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분명 저런 짓 하라고 뽑아 준 것도 아니고, 세금을 내는 것도 아닐 터인데 말이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다. 거기다가 교회 이름도 “참사랑”이니, “은혜”니, “사랑 제일”이니 하면서 사랑을 강조하지만, 심각한 이기주의에 빠져 헌금이 줄어들지 않도록 하는 데만 신경을 쓰는 것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요즘 교회발 확진자가 심심찮게 나오는 것을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목사라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목의 핏대를 세우지만, 과연 교회가 대 사회적으로 헌신하는 것이 무엇이며, 이 코로나 사태가 엄중한 이때 이웃을 위한 사랑 행위가 무엇인지? 교회 출석만 강조하는 것이 과연 소중한 신도들과 이 사회를 위하는 길인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어떤 곤충학자가 알프스에 사는 개미를 연구하던 중, 개미들이 집단을 이루어 사는 곳에다가 양초를 하나 세워두었다고 한다. 그러자 개미들이 그 촛불을 끄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불 속으로 던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몇 마리의 개미가 촛불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지자, 거짓말같이 촛불이 꺼져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개미들은 몸이 탈 때 키츤스라고 하는 불연성 진액을 몸 밖으로 흘려보내서 그 진액이 양초의 불을 꺼버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 사회 저 구석에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불로 뛰어드는 개미처럼,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희생하고 있는 방역의료진들의 피나는 헌신을 보면 무엇으로, 어떻게, 다 감사를 해야 할지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다른 사람이야 죽든지 말든지, 성도들이 코로나에 거리거나 말거나, 대면 예배를 위해서는 순교라도 하겠다는 사람도 있으니 그것이 과연 순교란 말인가? 목회자 자신만 죽으면 다행이지만 교인들까지 사지로 내몰고,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이 과연 순교란 말인가?
오늘날 이러한 교회를 향한 노한 민심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고, 달래기 위해서는 가녀린 몸을 촛불 속에 내던지면서까지 키츤스를 흘려보내 그 거대한 촛불을 꺼버리는 개미처럼, 자신을 불태워서 사랑의 키츤스를 내 보내야 하는데, 하나같이 자신을 희생하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불을 끄려고만 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노파심이기를 바라지만, 이 상태대로라면 전도는 물론 앞으로 교회의 문을 닫아야 하는 비운을 맞을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도 생긴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은 고통당하고 있는 코로나19 확진자들을 위해 하루속히 집회를 비대면으로 바꿀 뿐만 아니라, 큰 교회들은 교육관 같은 유휴(遊休) 건물을 코로나 치료센터로 제공하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봉사하는 등, 정성을 다하는 선제적 노력과 결단이 절실히 필요한 때라 여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코로나19는 물론, 그 외에도 권력 남용의 불의와 불평등, 부조리, 그리고 죄악의 불길이 맹렬히 타오르고 있다. 이런 불길을 끄기 위해서는 우리 기독인들이 이 혼란한 사회 속에 들어가 자신을 희생하여 거룩한 키츤스를 품어내어 그 어떤 사탄의 견고한 진도 능히 격파할 수 있는 강력한 십자가 군병이 되어야 할 것이다.
늦지 않았다. 어느 한때 도전을 받지 않았던 때가 있었겠는가마는 특히 초대교회나 중세 교회도 그 모진 고난의 세월을 잘 이겨왔지 않았는가! 지식을 넘어 사랑으로, 다시 시작하자. 다시 힘을 내자. 성령이시여!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