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시아 성지순례 여행기(2)
소아시아 성지순례 여행기(2) // 황우 목사 백낙은.
* 3월 31일(목)
아침 7시쯤에 성서 명으로 비시디아 안디옥, 현재 지명은 얄바츠로 향했다. 버스로 두 시간을 넘게 달려온 이 안디옥은, 바울의 선교 중심지로 바울 기념교회 터가 있었다. 바울 기념교회를 돌아보니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던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가 있다. 다시 두어 시간을 더 달려 히에라폴리로 갔다.
히에라폴리라는 말은 “거룩한 도시” “성스러운 도시”라는 뜻인데, 그래서인지 많은 신전들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숙박업과 고리대금업이 성행했다고 한다.
이 히에라폴리와 라오디게아, 그리고 골로새가 4~50리 간격으로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 모두 바울의 제자인 에바브라가 개척한 교회들이다.
다시 애급의 마지막 바로였던 클레오파트라가 찾아 왔었다는 파묵칼레로 갔다. “파묵”이란 말은 목화라는 뜻이고, “칼레”란 성(城)이라는 뜻으로 “목화의 성”이라는 의미이다. 세계 5대 면화 생산국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묵갈레는 온천에서부터 흘러내린 온천수의 석회질이 몇 억년을 흐르면서 응고되어 산처럼 쌓였고, 다랑이 논처럼 되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목화처럼 보였고, 하얀 백설이 산에 덮여 있는듯하여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 온천물에 잠깐이지만 발을 담그고 사진도 찍었다. 물은 그리 따뜻하지 않았다. 이런 물이 관을 통해 라오디게아 까지 공급 되었으나, 도중에 물이 식어 차지도 덥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신앙도 차지도 덥지도 않았다고 책망을 받은 것이다. 지진으로 파괴된 라오디게아 신전의 잔해 중에 십자가 문양이 뚜렷하게 남아 있어 라오디게아 교회 공동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온천물이 흘러 그 아래에 커다란 호수를 형성했고 그 아래로 아름다운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파묵갈레 위쪽에는 생명나무라 일컫는 사이프러스가 숲을 이뤘는데 벤치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로마 황제가 누렸던 호사라 감사의 눈물이 난다.
다시 숙소로 가는 길 우측에는 메크로 폴리스(죽은 자들의 도시)가 있는데 거기에는 수천의 무덤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병을 고치기 위해 이곳 온천을 찾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다.
6시경 COLOSSAE THERMAL 호텔에 도착하여 1시간여 동안 야외 수영장에서 수영을 즐기고 호텔에서 석식을 했다.
2백여 명은 됨직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식사를 하는데 종류를 다 가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음식들이 차고 넘쳤다. 누구냐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배가 부르다. 지금 세계 구석구석에는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배가 불러 숨을 헐떡이니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 가눌 길 없다.
옛날 바벨론 군왕들의 식당은 길이만 해도 1.6Km요, 음식은 식당 가운데 있는 길을 따라 황금마차로 날랐다고 한다. 그 식당에 귀인 1만 명을 초청하여 식사를 했다고 하는데 우리도 그 옛날의 사치를 닮아 가는듯하여 마음이 야릇하다.
* 4월 1일(금)
만우절 이른 아침부터 형제우애라는 뜻의 빌라델비아 교회를 찾았다. 빌라델비아는 현재명이 알라 세히르(Alla Sehirr) 알라의 마을이란 뜻이다.
그 옛날 빌라델비아는 지진의 도시였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지진으로 파괴된 빌라델비아를 재건하고, 자기신전을 짓고 황제숭배를 강요했다. 그 신전에 참배한 후에는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만족케 하기 위해 포도주를 마시고 만취된 채 집단 성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이를 본 바알신이 흥분하여 자기도 성관계를 하고, 사정을 해야 땅에 비가 많이 오고 풍년이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이곳에는 더 넓은 밀밭이 자리하고 있었고 포도농장도 많이 보였다.
이에 바울 사도를 비롯한 빌라델비아 교회공동체는 세상에 우로를 내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이런 행위는 하나님 앞에 가증한 행위임을 설파하고, 황제숭배 사상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 그래서 계시록에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의 칭찬을 받은 것이다.
그 다음으로 마이더스 왕의 황금의 성이었다는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던 사데 성을 향했다. 현재는 사르트(Sart)라고 불린다. 이곳은 파크톨로스 강에 사금이 넘쳐났기 때문에 마지막 왕 크로이소스가 황금의 성을 이루었다는데서 황금의 손 이야기가 나온 것이라 보인다.
사데 교회는 성 자체가 산정(山頂)에 있기 때문에 이단사상과 황제숭배사상으로 부터 오는 핍박이 비교적 적었다. 그래서 안일하고 태만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살았으나 죽은 교회”라는 책망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아데미 신전 뒤편으로 사데교회 유적들이 보인다.
빌라델비아 성을 지나 / 사데 성터 찾아드니 / 호화롭던 그 시절 물같이 흘러가고 / 무너진 성벽엔 바람소리만 허허롭다. / 깎아지른 절벽위에 / 난공불락의 성벽 쌓았지만 / 파수꾼이 졸다가 두 번이나 침략을 당해 / 인간의 계획은 수포라는 것을 / 웅변적으로 말해 주는 듯하다.
그 성벽 바로 아래는 / 죽은 자들의 마을과 / 산자의 마을이 서로 정겹고 / 그 맞은편 언덕에는 / 아르테미스 신전과 / 요한 기념교회 터전이 / 다정하게 어깨동무하였다. / 하늘 높이 솟은 사이프러스 나무숲에선 / 멧비둘기 구슬피 울며 나는데 / 산수(傘壽)를 앞둔 노종을 슬프게 한다.
그 다음으로 주님께로부터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했다고 책망을 받은 두아디라 교회를 향했다. 두아디라의 현재 이름은 악크 히사르(Ak hisar)이며 두아디라는 두아의 도시라는 뜻이다. 알랙산더 대왕의 계승국가 중에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셀레우코스 1세가 자기 딸의 이름을 붙여 건설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두아디라 도시는 평지에 자리하고 있어 적을 방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래도 이곳에 도시를 건설한 이유는 버가모 성을 지키기 위한 위성도시로 세운 것이란다.
가는 길 좌우편에는 올리브 농장이 이어져 있었다. 한 때 올리브유가 만병통치약으로 사용되었는데, 수명은 길지만 본격적으로 수확하자면 30여년이나 걸리기 때문에, 며느리만 호강시키는 나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두아디라에는 그 당시 가장 영향력이 있던 아폴론 신전이 남아 있고, 교회 유적은 마을 한가운데 그 흔적만 흩어져 있다. 여기서도 예외 없이 음란이 성행했었는데, 그 음녀를 두아디라에서는 이세벨로, 버가모에서는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로 표현하고 있다.
버가모는 소아시아 무시아도의 성읍으로 “높아졌다” “교만하다”는 뜻이다. 버가모는 양피지의 발달로 20만권의 장서를 가진 세계 제 2의 도서관이 있는 학문의 도시였다. 그리고 세계 7대불가사이 중의 하나인 제우스 신전과, 아데네, 디오니소스, 아스크라피우스 신전이 모여 있는 미신숭배의 중심지였다. 여기 세라피스 신전이었던 곳에 버가모 교회 공동체가 있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이스탄불, 앙카라에 이어 터키 3대 도시 중 하나인 이즈미르 즉 서머나로 향했다. 이 서머나는 지금 인구가 300여만이나 되는 터키 제2의 도시이다.
이 서머나는 몰약이라는 뜻으로 아시아의 모든 도시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다. BC 1000여년에 건설 되었으나 BC 600여년 경 루디아 족에게 멸망당했다. 그 후에 루시마커스에 의해 BC 200년경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이 서머나는 이방종교의 중심지였지만 서머나의 교부 폴리캅이 여기서 화형을 당하는 등 시련이 많았지만 믿음을 잘 지켰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신‘ 우리 주님은 ”죽도록 충성하는 자들에게 둘째 사망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는 약속을 하셨다.
지금 이즈미르에 황제 숭배를 거부하다가 순교한 폴리캅 기념교회가 있지만 현지 교회 사정으로 외관만 조망한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SUHAN 360 호텔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