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치명적 모순
자본주의의 치명적 모순. // 황우 목사 백낙은
그동안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도가니 속과 같은 탄핵정국이 1년을 넘겼다. 다행한 것은 우여곡절 끝에 제19대 대통령이 선출되어 무주공산에 구심점이 생긴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쉬어본다. 새로 취임한 대통령이 광화문 시대를 열겠다고 공언했고, 퇴근 후에 시장에 가서 장보기를 하는 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는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시급한 것은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인 소득의 불균형을 해결하고 극복하는 일이라 여긴다. 인류는 그동안 이러한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공산주의 사회만이 이 소득의 불균형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공산사회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구소련과 중국, 그리고 북한이 보여 준 대로 역시 그들도 성공하지 못했다.
구소련은 붕괴하였고, 중국 또한 준 개방사회가 되어 시장경제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완전한 공산주의 체제라고 자칭하는 이북도 장마당의 출현으로 서서히 공산체제가 붕괴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까지 인류가 발명한 가장 좋은 제도라고 여겼던 자본주의가 이제는 빈익빈 부익부의 치명적인 모순으로 심각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지구상에는 분배의 불균형으로 인하여 배가 불러 죽는 사람도 있지만, 굶어 죽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이런 불균형의 사회는 살아 있을 때뿐 아니라, 죽어서도 계속 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얼마 전에 체코 프라하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프라하란 도시는 앤드루 성당을 중심으로 부챗살처럼 시가가 형성되어 있어 매우 독특하기도 했고, 매우 깨끗한 도시라는 인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런데 프라하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비셰흐라드” 공동묘지가 있는데 지금도 그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보통 묘지라고 하면 음산한 분위기일 것이라는 선입관이 있지만 여기는 하나의 예술 공원과 같았다.
이 공동묘지는 1866년 “앤서니 비에 렘”이 건설했다고 하는데, 예술, 문화, 학문적으로 유명 인사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크고 작은 조각품들이 늘어서 있었고, 훌륭한 입상들도 여기저기 보였다. 그러나 초라한 묘비 석 하나만 세워 놓은 무덤도 있어 빈부 격차가 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번에 뉴욕을 관광하고 맨해튼에서 케네디 공항으로 가는 길목에 천주교회가 운영한다는 공동묘지를 지나왔다. 그 규모가 얼마나 대단한지 도시계획 구간의 두 블록이나 차지하는 규모였다. 거기도 역시 빈부의 격차가 심해 보였다. 하늘에 닿을 것 같은 조각품이 있는가 하면 땅에 붙은 무덤도 있다. 이렇게 소득의 불균형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계속 되는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분배의 불균형이 해소되었던 때는 단 한 번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BC4~50년경에 이룩했던 예수 공동체 즉 초대교회이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며 완전한 공유공동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런 아름다운 평등사회는 이제 다시 이 땅 위에서는 바랄 수도 없는 것인가?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는 분명히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이사야 11:6~9절) “그때”가 오리라는 것을 예언했다.
여기서 이사야는 기득권자들과 통치자들을 이리, 표범, 사자, 곰, 독사로 표현했고, 노동자 농민, 장애인, 소외된 사람들을 어린 양, 아이, 염소, 소나 양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모든 계층이 다함께 어우러져 사는 세상, 다 같이 풀을 먹는 세상,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이런 이상향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게 보이긴 하지만, 인간들의 노력의 결과에 따라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란 믿음을 가진다.
이사야 선지자가 꿈꾸던 그 아름다운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우리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노력을 경주해야겠지만, 특히 대통령이나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대기업들의 독점 경제를 막을 뿐만 아니라, 소득이 골고루 분배되도록 제도를 만들어 쥐구멍에도 빛이 들어가는 아름다운 사회와 국가를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