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씨를 심으세요.
* 좋은 씨를 심으세요.
황우 목사 백낙원.
요즘은 농촌에서 한창 씨를 심을 때다. 사람들은 흔히 씨를 뿌린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어떤 의미에서 정성이 결여된 것 같아서 나는 씨를 심는다고 말한다. 내가 직접 농사를 지어 보니 더욱 그렇다. 그리고 씨를 심되 좋은 것만 골라 심어야 한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언행심사(言行心思) 기거동작(起居動作) 하나하나가 모두 씨를 심는 행동이다. 어떤 씨를 심느냐에 따라 그 열매가 결정된다. 그럼 좋은 씨를 심는데 있어 어떤 요소와 조건이 필요한가부터 생각해 보자.
첫째 조건은 시기이다.
보통 벼를 비롯한 다른 씨앗들은 이른 봄에 심어야 하고 보리는 대게 가을에 심어야 한다. 시기를 놓치고 나면 더 이상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 원리로 인생도 그렇다. 하루의 설계는 새벽에 있고, 일 년의 계획은 봄에 있으며, 일생의 계획은 소년기에 있다고 한 것과 같이, 시기와 때를 놓치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다.
둘째 조건은 정성이다.
씨는 대게 씨앗의 두께에 비해 2-3배 정도 정성스럽게 묻어 주어야 싹이 가장 잘 난다. 그런데 아무리 씨를 많이 심었다고 해도 정성이 결여되면 많은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
사람들이 저에게 많이 하는 질문이 있다. “화분이 더러 생기는데 얼마 되지 않아 죽어 버리는데 어떻게 하면 죽이지 않겠습니까.”하는 말이다. 그 대답은 한마디로 “정성을 기우리십시오.”이다. 관심을 가지지도 않고 정성을 기우리지 않기 때문에 죽이는 것이다. 식물은 분명히 인간에게 의사를 전달한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모든 식물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조건은 노력이다.
즉 땀이 흘러야 한다. 땀 흘리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누릴 수가 없다. 땅은 진실하기 때문에 땀 흘린 것만큼 소출을 낸다. 그런데 요즘 세대는 땀 흘리기를 싫어한다. 일하지 않고도 부정축재(不正蓄財)를 하여 떵떵 거리면서 잘 사는 사람들이 더러 있기 때문인지 일확천금(一攫千金)을 노리는 사람들이 많은듯하다. 그러나 그 개인이나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크게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인생살이에 있어 어떤 씨를 심어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남는다. 무론 필요한 것을 심어야 한다. 콩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콩을 심어야 하고 팥이 필요한 사람이면 팥을 심어야 하는 것처럼, 성공적이고 행복한 인생을 설계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다음 서너 가지 씨를 반드시 심어야 할 것이다. 그럼 우리가 심어야 할 좋은 씨는 어떤 것인가.
1. 믿음의 씨를 심어야 한다.
인생을 하나의 나무에 비긴다면 뿌리는 성실이어야 하고 줄기가 정직일 때 행복이라는 열매가 맺히는 것이다. 성실이라는 뿌리와 정직이라는 줄기가 없는데 어떻게 행복이라는 열매가 맺히겠는가 말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모름지기 믿음의 씨를 심어야 한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 땅에 약속이라는 말이 생겼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계약서와 인장이 생겼으며, 영수증이 생겨났고 각종 잠금장치가 생긴 것 아니겠는가. 이같이 믿음은 인생의 삶에 있어 필수적인 요건이라 할 수 있다. 부부관계도 믿음에서 출발하고, 붕우관계나 이웃 관계, 그리고 노사관계도 마찬가지로 믿음이 근간이 되는 것이다.
믿음은 한자(漢字)로 사람인(亻) 변에 말씀 언(言)자이다. 사람은 그 말을 믿을 수 있어야 사람이란 뜻이다. 영수증이 없어도 계약서가 없어도 말 한마디면 그만이어야 한다. 말을 상황 따라 바꾸는 사람을 일컬어 식언(食言)한다고 하는데, 식언을 하는 사람은 절대 사귀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인생은 날마다 믿음을 심어야 한다. 아무리 적은 믿음이라도 심어 놓으면 반드시 큰 믿음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2. 희망의 씨를 심어야 한다.
유독이 기독교에서만 왜 소망이라고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소망이란 곧 희망을 말한다. 소망이건 희망이건 간에 영어로 말하면 비전(vision) 곧 희망(hope), 가능성(可能性)등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요즘 젊은이들이 꿈이나 비전 없이 현실에 동화되어 사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아프다. 비전이 없는 사람은 인간 기생충이 불과하다.
성경에 보면 요셉이라는 사람이 장차 형들의 머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그 꿈의 실현을 위해 일사각오로 삶을 영위했다. 그 때 그 형들도, 애급의 바로도, 도도한 나일 강물도 그 꿈을 쓸어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엔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있었다. 배신도 당했으며, 물 없는 우물 속 절망도 있었고, 생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같은 옥살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 비전을 버리지 않을 때 대 애급의 총리라는 더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므로 풍성한 결실과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소망 즉 희망의 씨를 심어야 한다.
3. 사랑의 씨를 심어야 한다.
바람을 심어 평온을 거둘 자 없으며 시기와 질투를 심고 사랑과 이해를 거둘 자 누구겠는가. 이것은 하늘의 진리요 불변의 법칙이다. 불평과 불만을 심고서야 어떻게 만족을 거둘 수 있겠으며, 허위와 가식을 심고 어떻게 진실을 거둘 수 있겠는가. 지금도 바람을 심어 광풍을 거두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물론 사랑에는 여러 가지 가 있다. 에로스(eros)라는 인간의 이성적인 남녀 간의 사랑을 말하는 사랑이 있다. 그리고 필리아(phillia)라는 사랑은 친구간의 사랑 즉 우정과 이웃사랑을 말한다. 그리고 스톨케(stolke)는 형제나 부자간의 사랑, 즉 가족애를 지칭한다. 마지막으로 아가페(agape)가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사랑, 무조건적 사랑을 말한다.
그 어떤 사랑이건 간에 책임감과 상호존경, 그리고 이해와 희생이 겸전되어야 한다. 사랑은 마치 식물이 광합성작용(光合成作用)을 하는 것처럼 지속성이 있어야 하고, 유익성이 있어야 한다. 사랑은 기쁨이요, 사랑은 꽃이요, 사랑은 향기요, 사랑은 아름다움(美)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심고 손해 볼일 없지 않겠는가? 일생동안 미워하다가 죽을 건가, 아니면 사랑하다가 죽을 것인가를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4. 평화의 씨를 심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만 없는 상태 에이레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샬롬을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로마식 평화, 아니면 힘의 우위를 점령하기 위한 무력증강만을 일삼는 아메리카식 평화를 추구해 왔다. 이는 그릇된 생각이요 그릇된 이념이다. 이렇게 꽃과 벌 나비가 적대관계가 되면 평화의 열매는 기대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샬롬은 단순히 평화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속에는 기원이 있고, 소망이 있고, 축복이 있다. 그리고 이 샬롬의 상태는 꽃이 벌과 나비를 영접하는 공생공존(共生共存)의 상태를 말한다. 정의가 없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다. 그래서 성서는 공의를 하수같이 흐르게 하라고 하셨다.
요약하면 믿음이 근간이 된 사회, 비전이 있는 사회, 사랑이 공기가 되는 사회, 공의가 깃든 샬롬이 넘치는 사회를 위해 그 씨를 소중하게 심어 나가야 할 것이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과 평화의 씨를 기회를 놓치지 말고 정성스럽게 꾸준히 심어 나가면, 분명히 만족과 기쁨과 행복이 충만한 푸르고 푸른 웰빙의 계절이 오고야 말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