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사랑의 실천이 필요한 때다.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 필요한 때다. // 황우 목사 백낙원.
흔히 우리는 고전 13장을 사랑 장이라고 한다. 아마도 많이 읽고 들었을 것이며 수없이 많은 설교도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나도 이 설교를 많이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면 고린도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사랑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엇이라 하면 좋을까? 그것은 “희생”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입으로 사랑을 말하고, 사랑 표현을 많이 한다고 해도 희생이 없다면 독선(獨善)이 될 뿐이라 여긴다.
이 사랑이라는 말은 독일어가 가장 잘 표현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독일어로 “나는 너를 사랑한다.” 즉 “이히 칸 디히 라이덴”(Ich kann dich leiden) 이란 말을 직역하면 “나는 당신을 위해 참을 수 있다”는 뜻인데,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이히 칸 디히 굿 라이덴” (Ich kann dch gut leiden)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너를 위해, 너 때문에 다가오는 고난이나 수모 등, 고통을 참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 사랑의 실천 방법 중에는 상대에게 고통을 주는 방법이 하나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자기를 벌하는 방법이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오늘날 많은 현대인이 가진 사랑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데, 상대를 도구화하여 자기만족을 취하는 행동 말이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표현은 많이 하는데, 고독사가 날로 늘어나고, 우리나라의 이혼율이 세계 1위라고 하니 깜놀?이다.
우리는 신구약 중간 사를 400여 년으로 잡는다. 이때는 예언자는 물론 선지자도 없었고, 출중한 종교 지도자가 없어서 자기 보기에 선한 대로 행하는 시대였다. 그 중간 사를 살펴보면, 한때는 자기 아들을 불살라 몰록에게 제사를 지냈던 적도 있었지만, 맏아들을 죽여서 벽에 세우고 벽을 바른 다음에 그 죽은 아들이 자기 집을 지켜 줄 것이라 믿었다는 황당한 기록도 있다. 이 얼마나 잔인한 독선인가 말이다.
그러나 두 번째 방법은 곧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방법인데, 예수님은 그때 하늘에서 열두 영이나 더 되는 천군을 불러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벌한 다음 자기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평강을 주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방법을 택하지 않고 자기를 벌하는 방법을 택하셔서 그 모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 이 사랑이야말로 그 어떤 불도 태울 수 없으며, 그 어떤 용광로도 녹일 수 없는 진실한 사랑이라 하겠다. 이런 사랑은 인류 역사상 예수님 밖에 보여 준 사람이 없음이 분명하다. 우리 크리스천은 그 사랑을 본받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요즘 코로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교회라고 예외는 아니지만, 이 위기가 곧 기회이다. 교회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이때 어떻게 전도지 들고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중세 때도 모진 역병이 돌았었다. 아무도 죽은 사람을 치우지 않고 시체가 방치되고 있을 때 기독교인들이 나서서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래서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고 교세가 더욱 확장되었다. 그렇다고 의학이 발달 된 오늘날에도 교회가 나서서 코로나 환자를 직접 적으로 도우라는 말이겠는가? 그럴 수는 없다.
우리는 지난 IMF 위기 때, 금 모으기도 했지만, 여러 교회가 쌀독을 비치하고 어려운 이웃들이 아무나 가져가도록 하는 등의 노력으로 그 위기를 잘 극복했다. 이처럼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 기회를 놓치면 교회당을 아무리 확장하고 화려하게 꾸며도 교인이 없는 교회당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가 유럽 여행을 갔을 때 유럽의 많은 교회가 교회당 일부를 심지어 빠(명칭은 잘 모르나 술을 파는 곳)나 가게로 세를 놓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무엇보다 급선무로 해야 할 일이 있다. 교회가 해야 할 여러 가지 급한 일도 많지만, 모든 계획을 다음으로 미루더라도 고통을 당하는 이웃과 아픔을 나누기 위해, 하루속히 그 방법을 모색하고, 그 지역에 알맞은 방법을 찾아 실천하는 것이 우리 교회가 이 위기를 헤쳐나가는 방법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