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영화를 보고.
1987 영화를 보고. // 황우 목사 백낙은.
며칠 전에 아내와 함께 1987이란 영화를 보았다. 그 내용에 대해선 이미 잘 알려졌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고문 방법에 있어 전에 내가 듣거나 상상했던 것보다 많이 부족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대중매체이기 때문에 모두 다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때 옥살이를 했던 동료 목사님들의 증언에 의하면 영화보다 더 잔인한 고문이 있었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예를 든다면 지옥의 소리와도 같은 소음을 들려주어 며칠이고 잠을 재우지 않는 고문, 가족들의 음성을 들려주면서 변심하도록 유도하는 방법, 그 외에도 똥통 고문 이야기도 있었고, 성기 고문 이야기도 들었지만, 나도 믿기지 않을뿐더러 말하기도 민망해서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한 혹독한 고문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당시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정의감에 불타서 민주화운동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나도 많은 사람에게 목사가 목회나 하지 왜 데모를 하느냐는 핀잔도 듣기도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당시 내가 포항에서 EYC 소속 청년들을 지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멤버들과 함께 독재에 항거하는 민중집회를 하기로 엄밀하게 모의를 했었다. 포항이라는 곳은 제철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감시가 심해서 노조결성은 물론 데모를 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거사일 당일 정작 집회를 주도하기로 한 EYC 소속 청년들이 제시간에 참석하지 못해서 차질이 빚어졌다. 청년들이 마지막 점검 차 어떤 다방에 들어갔다가 경찰에게 감금되어 정한시간에 참석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수백 명의 시민이 죽도시장 앞에 운집해 있었지만, 시간이 다 되어도 청년들이 나오지 않아서 항거운동이 무산될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생각다 못해서 나라도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내 옆에 김 모 목사님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내가 그 목사님에게 “우리 죽어도 깩소리라도 한번 하고 죽자.”고 했더니, 흔쾌히 수락했기 때문에, 포항 죽도시장 앞 개풍약국 사거리에 운집한 군중들 가운데로 뛰쳐나가서 데모의 불을 붙인 것이다. 사실 나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이 많은 군중을 이끌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통일의 노래를 비롯한 몇 가지 노래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는 것이 고작이었다.
운집한 시민 중에 “저 사람 누구야?” “저 사람 용기 있다.”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사실 나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만약 나도 잡혀가면 이미 들었던 그 잔인한 고문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렇게 내 나름대로 항거운동을 한다고 했지만, 1987 영화를 보니 그때 그 탄압과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운동을 했던 젊은이들에게 정말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좀 더 적극적으로 함께하지 못한 것 때문에 죄송하다는 생각과 함께 고마운 마음에 영화를 감상하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뒤돌아보면 민주주의란 피 위에 세워진 망루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권력이란 그 근본이 깡패 근성을 지녔기 때문에 우리가 모두 정신을 차리고 지키지 않으면 고무줄처럼 옛날로 되돌아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피와 땀, 그리고 눈물 흘려 이룩한 민주주의를 다시 도적맞지 않도록 망루에 서서 지켜야 한다. 그리하여 더욱 아름다운 대한민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