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 김정준 박사 // 황우 목사 백낙원.

 

내가 죽는 날!

그대들은 저 좋은 낙원에 이르리니찬송을 불러주오.

또 요한계시록 20장을 끝까지 읽어주오.

그리고 나의 묘비에는 이것을 새겨주오.

임마누엘단 한마디만을!

 

내가 죽는 날은 / 비가 와도 좋다.

그것은 / 내 죽음을 상징하는 슬픈 눈물이 아니라,

예수의 보혈로 내 죄를 씻음 받은 감격의 눈물!

 

내가 죽는 날은 바람이 불어도 좋다.

그것은 / 내 모든 이 세상의 시름을 없이하고

하늘나라 올라가는 내 길을 준비함이라.

 

내가 죽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햇볕이 비춰도 좋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에 안긴

내 얼굴의 광채를 보여 줌이라.

 

내가 죽는 시간은/ 밤이 되어도 좋다.

캄캄한 하늘이 내 죽음이라면

저기 빛나는 별의 광채는

새 하늘에 옮겨진 내 눈동자이니라.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이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다만 주님의 뜻이면

이 순간에라도 닥쳐오기를!

번개와 같이 닥쳐와 번개와 함께 사라지기를!

 

그다음은 내게 묻지 말아다오.

내가 옮겨진 그 나라에서만

내 소식을 알 수 있을 터이니

내 얼굴을 볼 수 있을 터이니!

위의 시는 고 김정준 박사님이 쓰신 시이다. 솔직히 나는 김정준 목사님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다. 다만 한신대학을 다니신 나의 백씨 백낙기 목사님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의 저서나 강의록에 접했었다. 나의 목회 초기에는 목사님의 설교문을 주기적으로 받아 읽었기에 나의 목회에 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던 분이시다. 그래서 인지는 모르나 그분에 대한 나의 사랑은 각별하다 하겠다.

 

김정준 목사님이 고인이 되신 후 어느 날 이 시를 접하고 마치 고인이 살아 돌아오신 것 같은 반가움에 자주 애독하는 시가 되었다. 그래서 정준님의 일생에 대한 관심이 생겼고 유심히 살펴서 요약한 것임을 밝혀둔다.

 

기장인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만수 김정준 박사님은 한국 신학계의 거성으로서, 신학교육과 에큐메니칼 운동의 역동적인 인물이었으며, 신학을 시로써 풀이한 시적인 신학자였다. 물론 선생의 전공은 구약성서신학이므로 엄밀히 말해서 구약신학의 성서학계의 거성이라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김정준 선생은 1914116일 부산 동래의 조그만 산골에서 독실한 기독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곳 빈촌이었기 때문에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가난했었다고 한다그러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하루 50리 길의 걸어 보통학교를 졸업했다는 것이다.

 

만수 김정준의 생은 송창근 목사님과의 인연에서 비롯되고 귀결 지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송창근 목사님이 조만식 선생에게 부탁하여 그 집 가정교사로도 일을 했고, 송창근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산정현교회에서도 열심히 봉사했다고 한다.

 

나중에 그는 송창근 목사님이 시무하는 제 고향인 경북 김천 황금동 교회 부목사로 부임하는 날 조국의 해방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송창근 목사가 그해 11월경에는 교회 시무를 못 하시게 되어 정준님은 교회를 혼자 힘으로 이끌어 가야 했다. 나중에 김천 황금동교회 시무 시절을 회상하면서 "내 짐은 정말 무거웠다."고 하는 표현은 그만큼 그의 건강이 매우 악화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드디어 그는 1946년 부활절 설교를 쓰고 각혈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그날 설교는 어떤 장로님이 낭독으로 대신했지만, 그는 곧 교회를 사면하고 홀로 마산 요양소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1946618일이었다. 정준님은 마산요양소에서 6급환자로 분류되어 사실상 죽음을 기다리는 운명에 처해있었다. 그러나 그는 30개월의 요양 후에 퇴원하여 조선신학교 교장 겸 성남교회 목사인 송창근 목사의 부름을 받고, 19492월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6급 환자인 그가 퇴원하여 정상적이니 일을 한다는 것은 실로 기적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관에서 나온 사나이"라고 불렀다. 그는 19481130일 퇴원하였고, 이날을 그의 제2의 생일로 감사하며 축하하였다고 한다.

 

2의 생을 산 김정준의 33년간은 사실상 신학, 목회, 선교, 에큐메니칼운동으로 가득한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는 한신대에서의 교수와 학장 (1961.9-1962.5)으로, 그리고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의 교수와 교목실장(1963.4-1969.2)으로, 연합신학대학원 초대원장(1964.1-1970.4)으로 봉직했다.

 

이 기간 동안에 그의 주 저서들이 많이 집필되었으며, 훌륭한 논문들과 세계교회와의 관계도 열심히 맺어졌다신학과 교육그리고 저술활동이 문장화되어, 우리가 읽고 느낄 수 있는 형체로 남겨진 것은 그가 한국 신학계에 남긴 귀한 유산이 아닐 수 없다.

 

간단하게 정준님의 생을 살펴보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나의 삶과 비슷한 데가 많아 애착이 간다. 그가 "평양서 중학을 마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 고백과 같이, 내가 야간으로 중, 고등학교를 나오고, 신학을 졸업하여 목사가 된 것 또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정준님은 50리를 왕복하였다지만 나도 왕복 20리 길을 매일 왕복하면서 6년 동안 주경야독을 하였다. 때로는 공사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고 사무실에 보이 노릇을 하였는가 하면, 철공소, 목공소 등은 전전하면서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엔 야학을 다닌 것이다.

 

정준님은 폐결핵 6기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나셨지만, 나도 결핵균인 늑막염을 오랫동안 앓아 사경에까지 이르렀던 경험이 있어서 더욱 공감이 가는 생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나 이 시를 읽을 때면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자세와 소망이 가득한 것을 보면서, 힘을 얻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한 한 개선장군을 보는 것 같아 너무너무 좋아서 고인이 되셨지만, 아직 나는 그분을 잊지 못한다.

 

내가 죽는 날은 / 우리 주님 만나는 날인데 / 비가 오면 어떻고 눈이 오면 어떠하며, / 바람이 불면 어떠하고 잠잠하면 어떠하며, / 밤이면 어떻고 낮이면 어떠하겠는가. / 내 영혼 해같이 빛나고 별처럼 반짝이며 / 생명수가 강처럼 흐르는 하늘나라로 가는데 / 주님이 맨발로 나를 영접해 주실 터인데 말이다. 아멘.

 
Posted by 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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