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의 치유. // 황우 목사 백낙은.
지금 우리는 수많은 갈등을 겪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물론, 남북 간의 갈등, 동서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어, 말 한마디, 글 한줄 쓰기가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아내는 남편과 갈등하고, 부모는 자녀와 갈등하고, 스승은 제자와 갈등하고, 세대와 세대, 문화와 문화가 갈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회사는 노조와 갈등하고, 정당은 정당끼리, 나라는 나라끼리, 민족은 민족끼리 갈등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같이 누구나 어느 정도의 갈등을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갈등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갈등이 없는 인간사(人間事)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어차피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숨을 쉬고 사는 동안은 갈등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역사학자 토인비는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이라는 공식으로 풀면서, “적당한 강도의 도전과 갈등이야말로 문명을 발달시키는 원동력”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어떤 사회학자는 인간의 역사는 갈등의 역사라고도 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는 어떻게 이 갈등을 풀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은 서로간의 이해(理解)와 양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이해(理解)라는 말은 영어로 언더스탠드(under·stand), 즉 “아래에 선다.”는 뜻인데, 서로 간에 “입장 바꾸기”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도 포용(包容)을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이 또한 서로의 다름을 이해(理解)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사실이다.
데스카라 라는 시인은 사랑에 비극이란 없다. 오직 사랑이 없는 곳에서만 비극이 존재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내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그 오해 때문에 비극과 갈등이 생긴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약점이 보이거나, 주변 사람들에게서 허물이 보이고, 이웃과 갈등이 있다면, 언더스탠드(under·stand), 즉 그 사람의 입장에 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이해(理解)와 “입장 바꾸기”가 우리 모두를 하나 되게 할 수 있고, 모든 인생의 장(場)에서 만날 수 있는 갈등을 풀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열쇠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 것으로 믿는다.
특히 반세기를 훌쩍 넘기고, 한 세기 가까이 반목해오던 남북의 정상이 오는 4월 27일에 역사적인 만남이 이뤄진다. 이 만남을 기점으로 파멸로 치닫던 남과 북, 그리고 세계의 모든 갈등이 치유되어 “상생(相生)의 관계”로 발전되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