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12월 1일(일)
12월 첫 번째 주일이다. 딸 둘과 우리 내외가 함께 예배를 드렸다.
성경 벧후1:5~11절을 읽고 “덕스러운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다.
성서는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고 말씀한다. 그러나 주님의 육친인 야고보는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낮게 평가했지만, 사실 믿음과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종이의 양면과 같아서 분리할 수가 없는 것이라 여긴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도 믿음은 무르익어가야 하는 것, 성숙해져야 하는 것이지 정체되어 있어선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마치 아기씨(精子)가 난자에 정착을 하면, 서서히 핏줄이 생기고 오장육부가 생길 뿐만 아니라, 소화계, 신경계, 그리고 뼈와 조직이 생겨서 나중에는 아기로 세상에 태어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그렇다고 아기로 그냥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성장하여야 성인이 되는 것과 같다.
이런 원리로 베드로는 첫 단계로 믿음에 덕을 더하라고 하셨다. 덕은 눈사람을 만들 때와 같이 처음엔 눈을 조금 뭉쳐서 그것을 자꾸 굴리면 큰 눈사람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덕이라는 말은 사전 상으로 보면, 맑고, 옳고, 크고, 착하고, 아름답고,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 마디로 요약하면 병아리를 품은 어미닭의 품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래 전에 전남 강진에 있는 강진읍교회에 가본 적이 있다. 교회당 모양이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품에 품은 것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정말 감동적이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이 그 속이 비데구멍과 같거나,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을 나올 것 같지 않거나, 그 사람 곁에 가면 찬바람이 쌩쌩 난다면 어떻게 그 사람을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말이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원론이 아니라 각론이다. 이론이 아니라 행함이다. 비판이 아니라 관용이다.
논어에도 보면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덕은 외롭지 않고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덕스럽지 못하면 이웃이 없고 외롭고 고독하다는 말이라 여긴다.
요즘 내가 그동안 해온 목회를 되돌아보면 맺고 끊는 일을 잘 했는지 모르나 덕스러운 목회를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후회스럽기 짝이 없다.
대하21:20절에 “여호람이 30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8년을 치리하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다.”고 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사람이며 실패한 인생인가 말이다. 8년 동안 그가 덕치를 했다면 그 결과는 얼마나 멋지고 영광스러웠을 것인가 말이다.
결론으로 베드로는 8절에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없는 자는 맹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더하는 생활이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이며 실족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리라.”고 하셨다. 이렇게 더하는 생활은 쉽지도 않고,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날마다 꾸준히 노력하여 마지막에 사랑의 껍질로 완성되어 주님께 칭찬듣고, 영원을 쟁취하는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딸들은 서둘러 보내고 혼자 남았다. 할 수 있으면 차를 태워서 운동을 시키고 싶지만 비가 내려서 결국 복도에서 성경을 들려주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자리에 눕혔다.
밖으로 나가면 그래도 시간이 잘 가는 편인데 아내와 둘이만 집에 있으니 시간이 잘 가지 않는 듯하다. 일찍 저녁 식사를 챙겨 주고 나도 쉬려고 생각했지만, 소변이 새고 있어서 시간마다 기저귀를 갈아야 하니, 그것도 뜻대로 안 된다. “주여! 이 밤도 당신께 의지하오니 이 노종을 붙잡아 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