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신경 강해(13)(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

 

오늘은 사도신경 강해 13번째로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오며이다. 부활 신앙은 우리 기독교의 핵심교리이다. 그래서 예배 때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럼 먼저 죽음이란 무엇일까?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은 죽음의 종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민족은 지금까지 죽음이란 영원한 단절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장례를 치를 때 보면 상여 위에 올라선 요령잡이는 구슬픈 소리로 절망을 노래한다.

 

저승길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저승이라, “너화넘차 너화호, 너화 넘차 너화호,”

서산 명월 다 넘어가고 벽수비풍이 슬슬 분다, / 다섯 하면 열이로다, 열에 다섯 장부로다, / 인간 칠십 고락되어 팔십 장년 구십 춘광, / 삼만 육천일에 백 살을 산다 해도, / 병든 날과 잠든 날 근심 걱정 다 제하면, / 단 사십을 못사는 초로 같은 우리 인생, / 친구 벗이 많다 한들 어느 누가 동행하며, / 일가친척 많다 한들 어느 누가 대신할까, / 그대 한번 죽어져서 만 리 장천 돌아가면, / 어느 시절 다시 만나 낮은 데는 높아질 세, / 어느 임이 옆에 있어 이내 품에 안겨주리, / 뒷동산에 고목나무 잎이 필 제 돌아오며, / 솥 안에 삶은 팥이 싹이 날 제 돌아오랴, / 북망산천 가는 길이 이렇게도 급한지고, / 오늘 가면 언제 오나 누굴 마다 가시는가, / 꽃가마에 가는 임은 내마다고 잠드셨지, / 꽃과 같은 임을 두고 이제 가면 언제 오나, / 내년 이때 춘삼월에 꽃이 필 때 다시 오나, / 북망산천 한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누나, / 에고지고 설은지고 나무에미타불 / “너화 넘차 너화호 너화넘차 너화호,” 하고 울어 엔다. 이렇게 영원한 절망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신봉하는 사도신경은 분명히 몸이 다시 산다.”고 선포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은 영어로는 "플레쉬(Flesh)", 히브리어로는 바사르이며, 헬라어로는 살크스인데, 이 말은 곧 "" 이 고깃덩어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한국교회 신자들은 대부분이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은 하면서도 영혼 불멸 사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 한국의 많은 성도가 아직도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지 않고, “영혼 불멸을 믿는다는 말이다. 한국교회는 영혼 불멸을 믿고, 영혼 불멸을 이야기하고, 영혼 불멸을 꿈꾸고, 영혼 불멸을 노래하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비성서적이다. “영혼 불멸 사상은 인본주의 헬라 이원론인 플라톤의 사상이며 불교의 윤회 사상이다.

 

성서의 어느 곳에서도 우리 인간의 영혼이 원래부터 불멸이라는 사상을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이 사후에 다시 살 수 있는 유일의 길은 부활이라고 하는 하나의 기적을 통해서 뿐이다.”(M 할버슨 신학 사전 P393)

 

복음주의 신학 총서에서도 이러한 영혼 불멸 사상은 널리 용납되고 있는 기독교의 가장 큰 오해이다. 이 사실은 숨겨둘 수도 없고, 덮어 둘 수는 더더욱 없다. 우리 기독교의 죽음에서 부활 개념은 이 영혼 불멸 사상과 대립 되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영혼이 불멸하기 때문에 영생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죽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하고 선한 것으로 다시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 (O 쿨만, K 하임, H 루터, K 바르트 공저 복음주의 신학총서 제5.)

 

성서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지상의 존재를 완전히 멸하시는 것이요, 부활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새롭고 영원한 존재 양식을 주신다는 것을 말한다.(M 할버슨 신학 사전 종말론”P 382.)

 

우리 기독교는 이러한 이교도들의 신조와 같이 영혼 불멸을 믿는 것이 아니고 몸의 부활 신앙을 토대로 한 영생을 믿는다.”(기독교서회 편 기독교대사전 P675) 이같이 영혼 불멸 사상에는 부활 신앙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 신앙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은 영혼 불멸을 믿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확실하게 말씀하셨다.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24:39)라고 말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무덤엔 시체 따위는 없었다. 분명히 우리는 주님이 부활하신 모습 그대로 부활한다.

 

고전 15:20-21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하셨고, 고전 15:51-52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라고 하셨다.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라고 하셨다. 그렇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부활의 은혜를 약속받은 소망의 사람들이다.

 

그러면 부활 후의 신령한 몸은 어떤 몸인가를 질문할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문을 닫았는데도 나타나실 수도 있고, 사라지실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을 잡수실 수도 있는 등, 시공에 구애받지 않는 그런 몸의 상태를 설명할 도리는 없다. 그것은 굼벵이에게 매미의 세계를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에, 그 소망의 세계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이 소망을 주신 주님께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자.

 

그리고 부활이라는 것은 엄마 태 속에서의 호흡 방법인 탯줄이 끊어지고 코로 숨 쉬는 더 자유로운 삶으로의 전환이다. 탯줄이 끊어지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새 세상에서의 새 출발이었듯이, 코로 숨 쉬는 이 부자유스러운 몸이 완전한 삶의 양태로의 변화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말이다.

 

바울은 부활 복음에 심취하여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바울이 만약 영혼 불멸 사상을 전파했다면 헬라 문명이 팽배한 그 당시 사회에서 왜 그 같은 핍박을 받았겠는가?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3:15)

4:2절에서도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라고 한 것 같이 그래서 그 모진 핍박을 받았던 것이다.

 

물론 인간이 죽으면 육은 흙으로 돌아간다. 불에 태워져 재가 되기도 하고, 물에 빠져 고기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무에서 유를 만드신 분이시고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분이시다. 그런데 흙으로 돌아간 사람, 불에 타버린 사람이라 할지라도 부활시키지 못하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예수님처럼 죽었다가 예수님처럼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이 사도신경의 고백이다. 이것이 주와 더불어 영원히 사는 성서의 부활 관이며, 우리의 진정한 신앙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 멘.

 

Posted by 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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