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판을 다시 만들자. // 황우 목사 백낙은(원).
우리 집은 음악가 집안이라 할만하다. 아내는 나이가 일흔 넷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아직도 소녀의 목소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피아노도 치고 바이올린도 켜며 교회성가대에서 활약 중이다.
큰 딸은 대형 교회에서 성가대로 활약하고 있고, 아들은 악기를 다루는 솜씨가 여간 아니며, 둘째 딸은 폴란드 유학까지 다녀온 피아니스트이고, 셋째 딸은 성악을 전공한 성악가이다.
그러나 유독이 나만 음악에 소질이 별로다. 그런데도 40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불렀던 찬송가 덕분에 음치라는 소리는 듣지 않을 만하다. 그 중에도 특히 국악에 대하여는 그야말로 문외한(門外漢)이다. 물론 자주 접할 수 없었기 때문에 관심 밖의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나도 판소리를 배워 멋들어지게 창을 한 번 해 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이 판소리는 이씨조선 후기 충청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발달한 창악을 일컫는 말인데, 일정한 줄거리를 창극에 붙여 부르던 노래로서, 한 사람의 광대에 의하여 소리와 아니리*를 혼자 두세 시간씩 끈기 있게 부르는 것이 판소리이다.
그래서 양반계급에서는 이 노래를 “소리”라고 하여 낮추어 불렀으나 시조와 잡가, 민요 등과 함께 국악의 하나이다. 판소리에는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등 12마당이 있다고 들었다.
오래 전이지마는 우연한 기회에 무형문화재인 이 일주 선생의 판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선생께서는 춘향가 중 한 대목을 불렀는데, 춘향이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고, 내일이면 변 사또에게 물고를 당할 위급한 상황에서, 이몽룡이 과거급재를 한 후 암행어사 신분으로 돌아와 그 장모와 능청을 떠는 대목이었다.
이 판소리를 듣는 동안 긴장감과 초조함, 오장육보가 자리를 바꾸는 것 같은 이상야릇한 흥분과 기대, 애간장이 다 녹아내리는 것 같은 배뇨감(排尿感) 때문에 아랫도리가 저려 오는 것 같았다.
옛 선조들의 해학과 한이 서린 판소리를 들으며 옛 시대상을 보는듯했고, 서민 계급의 한숨소리를 듣는 듯했다. 만약 이러한 판의 문화가 없었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굿판, 씨름판, 춤판, 윷판, 심지어 노름판까지도 우리 서민 정서 순화에 한 몫을 한 것이라 믿는다.
옛날 천민 즉 쌍것들 취급을 당했던 서민들이 이 “판”에서 한숨을 돌리고, 한을 풀었으며 위로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신바람 나는 “판”이 외세에 의하여 깨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아주 옛날에는 대국이라는 오랑캐들이 그 판을 깼고, 나막신을 신은 왜구가 36년간이나 그 판을 깼으며, 서양 코쟁이들이 퇴폐적인 서양문물을 가지고 들어와 신명나는 그 우리의 “판”을 깨놓고 말았다.
그 뿐인가? 이 나라의 정치가들은 온 국민이 하나 되는 통합의 판을 만들어 주지는 못할망정 동서, 좌우, 진보, 보수로 편을 갈라 서로 불목하게 하여 “판”을 깨 놓고 있다. 거기다가 어떤 지사는 무상보육을 폐지한다고 하여 서민들의 “판”을 깨려고 하고 있다.
이제 서민대중들이 어디 가서 한풀이를 한단 말인가? 우리 서민들의 “판”들은 모두 “막판”으로 몰리고 말았다. 어디 “막판”이 아닌 것이 있는가 말이다.
“막판”이 되고 보니 사람들이 모두 조급증이 생겨 이틀에 한 번 꼴로 존속살해가 일어나고 있는 실증이다. 이는 말기적 현상이다. 내일이 없는 하루살이 인생을 사는 현실이 되고 만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노래란 노래는 모두 째지게 부르는 재즈요, 춤이란 춤은 광란에 발광이요, 먹자판이요, 난장판이요, 개판이 되고 말았다. 어느 것 하나 개판 아닌 것이 있는가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 조선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종족보다 잘 먹고, 잘 놀고, 일 잘하는 민족이면서 “판”을 잘 만드는 “판”의 민족이라 할 만 한데, 그 “판”을 잃고 만 것이 분통이 터질 것만 같고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이제 우리는 분발하여 신바람 나는 “판”을 다시 만들어야 하겠다. 건전하고 좋은 “판”, 어깨춤이 절로 나는 “살판”을 만들자. 마음껏 넋두리 하고, 마음껏 뛰놀고, 마음껏 먹고 춤추며, 노래할 수 있는 “살판”을 만들자. 인생은 놀이인간이다. 부정적인 “막판”의 문화를 되살려 적말 신바람 나는 멋진 굿(good)판을 만들어야 하겠다.
이참에 남북도 하루빨리 통일되어 온 겨레가 하나 된 마음으로 벅구*에 맞춰 얼씨구절씨구 춤출 “살판”의 세상이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이제부터라도 판소리나 배워 목이 터져라 창을 하면서 신명나는 “살판”을 만들어 봤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 아니리 : 판소리에서, 창을 하는 중간에 장면의 변화나 정경 묘사를 위해 이야기하 듯 엮어 나가는, 창 아닌 말이다.
* 벅구 : 사물놀이를 할 때 사용하는 북을 일컫는 경상도 사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