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을 사들여라. // 황우 목사 백낙은.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라는 평을 듣는다. 다른 그 어떤 나라 말로나 글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다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형용사(形容詞) 즉 그림씨(어떻씨)의 다양성이라 할 수 있다. 가령 “빨갛다”는 단어가 형용사로선 매우 다양하다. 어감이 큰 말 앞에선 “뻘겋다”, 어감이 보통인 말 앞에선 “발갛다”, 그리고 “붉다” “불그스름하다” 등등 얼마나 다양한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와 문자의 깊이에 있어선 그리스어의 희랍문자를 따라가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시간”이라는 말은 우리말로는 너무 단순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리스어에선 시간을 둘로 나눈다.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과 “카이로스”(καιρός) 의 시간으로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크로노스”는 달력에 표시된 시간, 즉 가만히 있어도 그냥 흘러가는 자연적인 시간을 말하는데, 아무 생각이나 행동을 하지 않고 살아도 흘러가는 객관적인 시간이다.
반면 “카이로스”는 상대적인 시간개념으로 같은 시간이라도, “크로노스”의 시간을 의미 있게 사용하면, 아주 고귀한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에선 “크로노스”를 “인간의 때”로,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때”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탈리아 북부 트리노 박물관에 “카이로스”의 조각상이 있다. 이 “카이로스”는 제우스신의 아들로 '기회'를 신격화한 남성 신이다. 그는 무척 재미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우선 그의 앞머리는 머리털이 무성하지만, 뒷머리는 머리털이 하나도 없는 대머리이다. 그리고 그의 양발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때로 그는 날개가 달린 공 위에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리고 저울과 칼을 손에는 들고 있다.
그 “카이로스”의 동상 앞의 경구(警句)(epigram)에는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고, 나를 발견했을 때는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며,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함이다. 그리고 저울을 들고 있는 이유는 기회가 앞에 있을 때는 그 저울로 신속 정확하게 판단하라는 의미이며,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있는 이유는 칼같이 결단하라는 의미이다. 나의 이름은 ‘기회'이다, 라고 쓰여 있다.
많은 사람이 우물쭈물하다가 그 “카이로스”의 앞머리를 잡지 못하고 지나간 다음에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뒷머리가 없는 카이로스를 잡기란 실로 어려운 것이다. 거기에다가 “카이로스”의 양발에는 날개가 달렸기 때문에 쏜살같이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카이로스”가 저울을 들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분명한 가치판단을 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 그리고 종교인들마저도 이 저울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하여 많은 사람의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속담에 “중(스님)도 아니고 서(庶)도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요즘 젊은이들도 차일피일 하거나, 인정이나 사정, 그리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어정쩡한 삶을 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많은 사람이 “크로노스”의 시간에 종속되거나 지배당하여, “크로노스”의 시간에 몸을 맡기고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우리가 “크로노스” 시간이 내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인지를 생각해야할 것이다.
마치 홍수 속에서 죽은 나무는 떠내려가지만 살아 있는 피라미는 오히려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다. 그럴 때 바로 그 “크로노스”의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카이로스”가 가진 날카로운 칼처럼 이 복잡한 현실 속에서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하는 순간순간 결단을 해야 할 것이다. 성서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앱 5:16)”라고 했다. 이 말은 “기회를 사들여라”는 뜻이다.
한 번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 같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잘 활용하여, “카이로스”, 즉 소중한 나만의 역사(history)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