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의 비애. // 황우 목사 백낙은.
앞서 “남이장군을 뵙다.”라는 글에서 이야기 한 대로 남이섬을 관광한 후, 서울 88올림픽대로를 통과하여 무의도에 도착하니 오후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서둘러 숙소를 정하고 들어가 보니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다음날 살펴보니 좋은 펜션들도 많이 있는데 성급하게 정한 것이 탈이었다.
다음날 제일 먼저 실미도를 찾았다. 무의도에서 실미도 사이는 바다인데 썰물 때는 길이 열리기 때문에 서둘렀다. 역시 약 4~500m쯤 될까 말까한 거리인데 바닷길이 열려 건너갔다. 실미도는 지름이 약 2Km 정도 되는 작은 섬이었다. “실미도”라는 영화를 본 분들은 잘 알겠지만, 분단의 아픈 상처를 고스란히 지닌 비운의 섬이다.
1968년 1월 21일 당시 김신조(지금은 목사님으로 재직 중이다)를 비롯한 31명의 공비들이 청와대 근처까지 침투했다가 발각이 되었던 사태가 있었다. 그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그들에게 서울로 침투한 이유를 물었더니 “박정희 멱따러 왔다.”고 했다.
이를 계기로 그 보복을 위해 김일성 암살을 목적으로 중앙유격사령부 684군 특공대(1968년 4월이라는 의미)를 창설한 것이다. 처음에는 사형수들을 대원으로 하려 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민간인 중에서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조건으로 선발하였고, 이북에서 파견했던 공비의 숫자와 같은 31명으로 부대를 창설했다.
북한에 침투하여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684부대원(1968.4-1971.8)들은 훈련도중에 7명이나 사망하는 등 혹독한 훈련 받았으나,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작전 자체가 불확실해졌다.
1970년 8월 15일. 남북이 평화적으로 체제 경쟁에 나서자는 '평화통일구상'이 선언되었기 때문에 복수를 위한 실미도 부대는 결국 존재가치를 잃게 되었고, '미래를 책임지겠다.'는 약속도 불확실해졌다.
오히려 보안을 위해 684 특공대원 전원을 죽이자는 제안까지 나온 터였고, 당시 정부가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을 때였다. 가혹한 훈련과 장기간의 기다림에 불만을 품은 부대원들은 1971년 8월 23일 6시경 교관 및 감시병 18명을 살해하고 섬을 빠져나갔다. 최초의 약속대로 책임을 지든지, 아니면 북파를 해 주든지 하라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청와대를 향해 가려한 것이었다.
이 23명의 대원은 12시 20분경 인천 연수구 옥련동 독불이 해안에 상륙한 뒤, 인천 시내버스를 탈취하여 청와대로 향하였다. 인천에서 육군과의 총격전으로 타이어가 손상되자, 이들은 다른 시외버스를 다시 탈취하여, 14시 15분경 서울 동작구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마지막 총격전을 벌이다 부대원 대부분이 스스로 수류탄을 터뜨려 목숨을 끊었고, 생존자 4명은 군사재판에 부쳐져 1972년 3월 10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이 사건을 '실미도 난동사건'으로 규정하고 그 진상을 은폐하였고, 그 이후 세간의 관심에서 잊힌 채 30여 년간 묻혀 있었다. 그러다 1999년에 684부대의 실상을 소재로 한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가 발표되고, 이 소설을 바탕으로 2003년 말 영화가 개봉하면서 사건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뼈아픈 사연을 지닌 실미도는 아직도 몸살을 앓고 있었다. 여기저기 행락객들이 버린 쓰레기들이 늘려 있었고, 고기잡이했던 폐어구들로 가득했으며, 억울하게 희생당한 공작원들의 한숨 소리인 양 파도소리마저 구슬펐다.
우리 역사에 이런 비극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으련만 아직도 남북관계가 대결 구도로 치닫고 있어 마음이 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