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생일과 외식. // 황우 목사 백낙은()

 

어제가 아내의 일흔 네 번째 맞는 생일이다. 아내와 함께 중국식당을 찾아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식당에 도착하여 큰맘 먹고 3만 원 쯤 하는 풀코스 요리를 시켰더니 게맛살 스프를 선두로 팔보채, 탕수육 등등 맛있는 요리가 줄줄이 나온다. 나중에 식사로는 볶은 밥까지 나왔고, 마지막에 후식으로 곶감 스프까지 먹고 나니 만삭이다. 식사 후 시간도 조금 있고 하여 바로 옆에 있는 커피 전문점을 찾았다.

 

그런데 하도 오랜만에 찾은 커피점이라 생경하기 짝이 없다. 지난 40여 년 동안 목회를 하느라고 다방을 갈 기회도 없었고 갈 필요도 없었다. 근래에 와서는 믹서커피가 나와서 손쉽게 커피를 마시느라고 다방을 멀리 했었다.

뿐만 아니라 식사대금보다 더 비싼 커피를 마시는 것이 사치인 것 같아 발길을 끊은 지 십 수 년은 된 듯하다.

자리를 잡고 앉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아무도 아는 체를 안 한다. 그래서 주변을 두루 살피다가 안내 글을 보니 손님이 직접 데스크로 가서 주문을 하고 받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산수(傘壽)를 바라보는 백발노인이지만 하는 수 없이 직접 데스크로 가서 주문을 하려 했는데, 차림표에 나온 커피 종류 때문에 또 한 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카프치노, 사케라토, 카페모카, 카페라테 등등의 차림표가 붙어 있는 것이었다.

 

주머니 사정도 그렇고 해서 그 중에 제일 값이 싼 3.500원짜리 에스프레소를 주문해 놓고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사용하는 호출용 번호판을 갖고 와야 하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그냥 자리로 돌아와 앉아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니 데스크의 아가씨가 우리 부부의 커피를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보아하니 늙은이라서 아마 배려 차원에서 갖다 준 것으로 보인다.

옛날 우리가 젊을 때 가끔 다방을 가면 예쁜 아가씨들이 어서 오세요. 이리로 앉으세요. 차는 어떤 걸 드릴까요? 라는 질문들을 하고, 커피를 시켜 놓으면 커피 한잔에 설탕은 얼마, 밀크는 얼마나 넣을 것인가를 물어 손님의 기호에 맞는 커피를 내오곤 했었다.

뿐만 아니라 다방 아가씨가 옆에 앉아서 시중을 들면서 차를 한 잔 얻어먹는 것으로 매상을 올리곤 했었다. 그런데 요즘 커피전문점을 가보니 커피를 마신 그릇까지 손님이 갖다 놓아야 하니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 갑이고 손님은 을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에스프레소라는 커피를 받아 놓고 보니 간장 종지 같은 작은 찻잔에 1/3쯤 아주 까만 액체가 나온 것이 아닌가. 맛을 보니 아주 쓴 진액이었다. 두리번두리번 하다가 데스크에 가서 물었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런데 이 커피를 먹는 방법을 알려 주세요.”라고 말이다.

옆에 작은 테이블을 가리키면서 시럽을 넣어 드세요.”라고 퉁명스럽게 한 마디 하는 것이 아닌가. 그 작은 테이블에 설탕과 프림(Frim)이 있었다. 그런데 뜨거운 물을 넣고 싶어 온수기에 더운 물 나오는 단추를 눌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왜냐고 물었더니 아기들이 다칠까봐 나오지 않게 해 두었단다. 그래서 주방에 있는 뜨거운 물을 얻어 와서 어렵사리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었다.

 

세월은 빠르게 지나고 한 일없이 나이만 먹고 보니 변하는 세대를 따라 잡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숨이 찰 지경이다.

요즘 젊은이들이나 아이들이 서로 나누는 대화도 마치 이방인들의 대화처럼 알아듣지 못하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노라면 오히려 내가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다. 방송을 시청하는데도 저게 무슨 말인지 몰라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그 뜻을 알 수 있는 외래어들과 줄임말들이 판을 치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요즘 현대화 되어 가고 있는 모든 문명이기도 나를 주눅 들게 하고도 남는다. 말하는 밥솥, 냉장고, 세탁기, 각종 전자제품, 핸드폰에 이르기 까지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차츰 늙은이들이 설자리를 잃어 가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리고, 즐거운 아내의 생일날이 그리 유쾌하지 못한 날이 된듯하여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기억력이나 두뇌 활동은 날이 멀다고 둔해지고 있는데,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과 달려가는 세월을 붙잡아 둘 수도 없고 허무한 인생을 서러워한다.

어떤 사람의 한 말 중에 노인의 씨가 따로 있는 게 아니란다.”라는 말이 오늘따라 더 크게 귓전을 때린다. (20153)

 

* 산수(傘壽) : ()자의 약자(略字)가 팔()을 위에 쓰고 십()을 밑에 쓰는 것에서 유래 된 것인데 80세를 일컫는 우리말이다.

Posted by 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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