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죽인 죗값. // 황우 목사 백낙원.
마태복음 27:25.
우리는 지금 사순절 기간이면서 고난주간이요, 이제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성금요일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사순절이나 고난주간, 그리고 성금요일이란 이 절기가 이름만 남아 있을 뿐, 그 정신은 찾아보기 어려워져서 허울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폐일언(蔽一言)하고 예수님 당시로 돌아가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고, 드디어 노예 한 사람의 값에 팔려,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고 석방하려 했으나,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리고 심지어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소리쳤다.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빌라도는 그들의 외침에 못 이겨 예수를 내어 주었고, 그렇게 예수님은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 후 AD70년 로마 디도스 대장이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예루살렘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루살렘 인구는 12만 명 정도였지만,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몰려든 순례객을 합하면 17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때 로마군이 유대인 110만 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고 하는데, 나중에는 나무가 없어서 매달지 못하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닥치는 대로 죽였다고 한다.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시체가 제단 주위까지 쌓였으며, 성소의 계단 아래로 피의 강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한다. 그뿐이 아니다. 성벽 아래로 사람을 던져서 성벽 아래에도 시체로 가득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남은 수천 명은 칼싸움을 시켜 서로 죽이게 했고, 젊은 사람 97.000명을 포로로 잡아갔다는 것이다.
해롯당원들 1,000명 정도 되는 수비대가 높이 434m요, 정상의 면적이 7만㎡ 정도 되는 마사다(Masada) 요새로 피해서 저항을 했다고 한다. 그중에서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을 포함한 1천여 명이 15,000명도 더 되는 로마군을 맞아 AD 72~73년 5월까지 거의 2년을 버텼다고 한다.
나중엔 로마군 8만여 명이 마사다를 에워싸고, 마사다 높이만큼 토성을 쌓아서, 결국 함락의 위기에 처하자, 마사다의 유대인들은 로마 군인에게 죽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는 방법을 택하였다.
먼저 자기 집으로 가서 처자식을 죽인 다음, 다시 모여 10명을 제비를 뽑아 그 열 명이 성안을 돌면서 전우의 목숨을 거두었고, 그리고 또 한 사람을 제비 뽑아 남은 아홉 사람을 죽인 후, 그 한 사람은 스스로 자결했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AD73년 5월 2일 마사다 요새는 완전히 함락되었고, 로마군이 거기 이르렀을 때는, 960구의 시체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수로에 숨었다가 살아남은 부녀자와 어린이 7명이 그 이야기를 전해주었기 때문에 그 전모를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40년 만에 이뤄진 사건이며, “예수의 피를 우리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한 말의 응보를 받은 것이라 하겠다.
그뿐이 아니다. 그 후 유대인들은 산발적으로 독립운동을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나라가 완전히 망한 다음, 세계 방방곡곡에 흩어져,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건건히 목숨을 이어 나갔다. 유대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이유도 모르는 미움을 받았는데, 1945년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했다.
말이 600만이지 조용히 한 번 생각해 보자. 대구와 경북 인구를 모두 합해도 600만 명이 안 된다.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 인구가 340만 명이요, 거기에 경북의 인구 270만을 모두 합해야 600만 명 정도가 된다. 이렇게 엄청난 유대인들이 학살을 당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예수의 핏값을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외친 결과라 하겠다.
이렇게 그 당시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죽이는데 가편 투표를 했지만, 그들의 승리는 단 사흘뿐이었다. 수많은 군중보다 한 사람 예수가 이긴 사건이 곧 십자가 사건이요, 부활 사건이라 하겠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다수결의 원칙을 존중하고 따른다. 하지만, 그 다수결의 원칙의 맹점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이 간다고 모두 바른길은 아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더라도 12명의 정탐꾼 중 긍정적인 보고를 한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다. 그래서 10:2라는 다수결의 원칙을 따랐지만, 결국 6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두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그들의 처와 잡 족을 합하면 100만 명이 훨씬 넘는다.) 그때는 두 사람이 졌지만, 결국 그 두 사람이 옳았던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말이다.
오늘날 사회에서나 교회에서도 아무리 많은 사람이 옳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생명을 걸고 막아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라고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