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 (김현구(金玄鳩) 님)
황우 목사 백낙원.
시심에도 불려갈 듯 보오야니 떠 있는
은빛 아지랑이 끼어 퍼른 먼 산 둘레
구비 구비 놓인 길은 하얗게 빛납니다.
임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
헤어진 성 돌에 떨던 햇살도 사라지고
밤빛이 어슴어슴 들 위에 깔리어 갑니다.
훗 훗 달은 이 얼굴 식혀줄 바람도 없는 것을
임이여. 가이없는 나의 마음을 알으십니까.
이 시는 김현구님의 시이다. 참고로 현구 시인은 1904년 강진에서 태어나서 6.25동란 중에 돌아가신 분으로 영랑시인과 더불어 강진의 서정을 노래한 시인이며, 박용하, 정지용등과 교류를 하였던 시인이다. 대표 시로는 "임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 "검정비둘기"등 다수가 있다.
이 시는 1910년 한일합병이 이루어진 다음 조국독립과 해방의 꿈이 점점 사라져가는 1920년경에 쓴 시이다.
시심에도 불려갈 듯 보오야니 떠 있는
은빛 아지랑이 끼어 퍼른 먼 산 둘레
구비 구비 놓인 길은 하얗게 빛납니다.
임이여 강물이 몹시도 퍼렇습니다.
시심(한숨)에도 불려 갈듯한 보오야니 떠 있는 은빛 아지랑이는,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처한 이 나라 조국의 현실인 듯 보인다.
안개가 뽀야니 떠 있어 은빛 아지랑이가 아른거리는 퍼른 산 둘레, 굽이굽이 놓인 길로 찾아올 것 같은 그 임은 오지 않고 하얀 먼지만 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현구님이 그토록 기다리던 그 임이 누구인가? 하염없이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면서 구비구비 임이 오시는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지만 하얀 먼지만 뽀야니 떠 있을 뿐이다.
그 옛날 자유로운 시절, 바라보던 강물은, 석양이 비쳐 황홀한 금빛이었는데, 그러나 지금은 일제에 모질게도 얻어맞아 시퍼렇게 멍이 들어, 바라보기조차도 눈물겨운 퍼른 강물이어서 몹시도 슬퍼하는 시인의 시심이 느껴져 마음이 아리다.
헤어진 성 돌에 떨던 햇살도 사라지고
밤빛이 어슴어슴 들 위에 깔리어 갑니다.
훗 훗 달은 이 얼굴 식혀줄 바람도 없는 것을
임이여. 가이없는 나의 마음을 알으십니까.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조국 광복이라는 그 임을 기다리다가 성 돌(城石)에 떨던 햇살마저도 사라지고 있다 한다. 한 줄기 희망인 독립과 해방의 햇살도 사라지니 어슴어슴 어둠과 절망만 깔리어 가는 안타까움에 몸부림치며 울고 있다. 이는 실낱같은 희망도 끊어지고, 절망스러운 어둠이 들판 위로 퍼져 나간다는 뜻이리라.
“훗 훗 달은 이 얼굴 식혀줄 바람”은 조국 광복의 열망으로 그 임 오시기만 하면 저절로 식혀질 바람과 같은 임인데, 오시질 않으니 얼굴이 더욱 훗 훗 달아오를 뿐이다. 거기다가 임을 기다리는 그 애틋한 마음마저 알아 줄이 없으니 안타까움이 한량없다. 이렇게 볼 때 시인의 임은 분명히 이 나라 조국이라 하겠다.
오늘 우리의 현실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대선이 시작되고 보니 이 나라와 사회는 혼돈탕이 되어 있는 듯하다. 진실은 은폐되고 허위와 가식이 판을 치며, 도덕적인 해이, 그리고 편 가르기로 사랑이 식어가는 현실은, 형구님이 보았던 것과 같이 아지랑이가 끼었고, 나라의 기강인 성 돌은 무너져 가고 있으며, 어둠이 어슴어슴 깔리어 가고 있는 현실인 것 같다. 그래서 강들은 몹시도 퍼렇게 멍이 들고, 바다 또한 죽어가고 있으나, 달아오르는 얼굴 식혀줄 시원한 바람 한 점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지금 이내 마음 어딘가에도 퍼런 강물이 흐른다.”